성경의 숨은 재밌는 이야기

고린도후서의 숨은 이야기

눈물로 쓴 편지, 꽉 막혔던 마음, 그리고 다시 열린 문. 바울의 편지 가운데 가장 속마음이 많이 드러난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질그릇, 개선 행진, 광주리, 육체의 가시. 열세 장을 한 구절씩 걸으며 헬라어 단어 속 이야기와 그 시대의 풍경을 함께 만나 봅니다.

13장 256절기록 · 주후 55~56년경 마게도냐함께 보낸 사람 · 디모데받는 곳 · 고린도와 아가야 온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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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편지 사이의 이야기

고린도후서를 읽기 전에 먼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짚어 봅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낸 뒤에도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계획에 없던 방문을 급히 다녀왔는데, 그 방문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근심 가운데" 방문이었습니다(2:1). 교회 안의 한 사람이 바울을 공개적으로 모욕한 것으로 보입니다(2:5, 7:12).

우주에서 본 고린도 지협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내려다본 고린도 지협. 두 바다 사이 좁은 땅 위의 도시 고린도는 바울에게 가장 많은 편지와 가장 많은 눈물을 받은 교회였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은 "많은 눈물로" 편지를 썼고(2:4), 디도에게 그 편지를 들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답을 기다리지 못해 드로아로, 다시 마게도냐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마침내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가 회개했다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7:6–7). 고린도후서는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는 안도와 기쁨, 아직 남은 서운함, 그리고 교회를 흔드는 거짓 사도들을 향한 날 선 경고가 한데 섞여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 고난과 약함을 이렇게 많이 털어놓은 편지는 없습니다.

3번바울의 고린도 방문 (13:1)
최소 4통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수
195대다섯 번 맞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모두 더하면 (11:24)
8가지11:26에 나열된 "위험"의 수
지도 가운데가 마게도냐의 빌립보 유적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어딘가에서 이 편지를 썼는데, 후대 일부 사본 끝에는 "빌립보에서 썼다"는 메모가 붙어 있습니다. 지도를 남쪽으로 내려 보면 편지가 향한 고린도가 나옵니다. 구글 지도에서 크게 보기 ↗

한 통의 편지일까, 여러 편지를 이어 붙인 것일까?

고린도후서는 9장까지 화해와 기쁨의 분위기인데, 10장부터 갑자기 날카로운 변론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1870년 독일 학자 하우스라트 이래로 10~13장이 바로 그 "눈물의 편지"였다는 주장, 또는 9장 이후 새로 나쁜 소식이 들려와 덧붙였다는 주장 등이 나왔습니다. 반대로 처음부터 한 편지였다고 보는 학자도 많습니다. 어느 쪽이든 오늘 우리가 읽는 고린도후서는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한 권의 말씀입니다.

1

위로의 하나님

환난 속에서 시작하는 찬송, 그리고 흔들린 여행 일정

1:1

디모데와 함께, 아가야 전체에게

고린도전서는 소스데네와 함께 보냈지만, 이 편지는 디모데와 함께 보냅니다. 디모데는 실라와 함께 고린도에서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1:19, 행 18:5). 받는 사람도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입니다. 겐그레아 같은 근처 마을의 교회들(롬 16:1)도 함께 읽었을 것입니다.

역사
1:3–4

다섯 절 동안 열 번 가까이 나오는 "위로"

"위로"(παράκλησις 파라클레시스)와 "위로하다"(παρακαλέω 파라칼레오)가 3절부터 7절 사이에만 열 번 가까이 쏟아집니다. "곁에"(파라)와 "부르다"(칼레오)가 합쳐진 말로, 힘든 사람 곁에 와서 서 주는 것을 뜻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부르는 이름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도 같은 뿌리입니다.

바울은 감사로 편지를 시작하던 평소 습관 대신,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합니다. 감사할 일보다 먼저, 환난 속에서 만난 하나님을 찬송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원어
1:4

위로는 흘려보내라고 주신 것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목적이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도다." 위로는 받고 끝나는 선물이 아니라, 받은 길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깊은 묵상
1:8

아시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바울이 에베소가 있던 아시아 지방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 대극장 소동, 고린도전서 15:32의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는 말, 혹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은 투옥이나 큰 병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그 일을 통해 "우리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1:9).

에베소 대극장
에베소 대극장. 사도행전 19장에서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동으로 사람들이 두 시간 동안 소리를 지르던 곳입니다. 바울이 말한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이 무렵의 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1:9

스스로 내린 사형 선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선고"(ἀπόκριμα 아포크리마)는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말로, 관청이 내린 공식 판결이나 회신을 가리키던 행정 용어입니다. 바울은 판결문을 이미 받아 든 사람처럼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판결문이 바울을 하나님께 던져 넣었습니다.

원어
1:11

기도하는 얼굴들

"많은 사람의 기도로 우리가 은사를 얻은 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원문에는 "많은 얼굴들"(πρόσωπα 프로소파)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하늘을 향해 든 성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문장을 썼습니다.

깊은 묵상
1:12

햇빛에 비춰 보아도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진실함"(εἰλικρίνεια 에일리크리네이아)은 흔히 "햇빛"(헬레)과 "판단하다"(크리노)가 합쳐진 말로 풀이됩니다. 옷감이나 그릇을 햇빛에 비춰 보아도 흠이 드러나지 않는 상태지요. 바울은 자기 삶을 햇빛 아래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고 말합니다.

원어
1:15–17

바뀐 여행 일정 때문에 생긴 오해

바울은 원래 고린도에 들렀다가 마게도냐에 가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고린도에 들르려 했습니다. "두 번 은혜"를 주려던 계획이었지요. 그런데 일정이 바뀌자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이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변덕쟁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목회자의 일정 하나가 신뢰 문제로 번진 것입니다. 바울은 23절에서 이유를 밝힙니다. "너희를 아끼려 하여" 가지 않았다고요. 또 한 번 아픈 방문이 되지 않도록 일부러 미룬 것이었습니다.

역사
1:20

모든 약속의 "예", 그리고 우리의 "아멘"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이 하신 약속에 대한 대답이 "예"라면, 그 "예"를 받아 우리가 하는 대답이 "아멘"입니다.

초대교회 예배에서는 기도와 감사가 끝나면 모인 사람들이 함께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고전 14:16). 바울은 변덕스럽다는 오해에 대답하면서, 결코 말을 바꾸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깊은 묵상
1:21–22

그리스도와 기름 부음의 말놀이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Χριστόν 크리스톤)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χρίσας 크리사스)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리스도"라는 이름 자체가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니, 헬라어로 들으면 같은 소리가 겹칩니다. 기름 부음 받은 분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인치시고"와 "보증"(ἀρραβών 아라본, 계약금)이 나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며 먼저 건네신 계약금입니다(5:5, 엡 1:14).

원어
1:24

주인이 아니라 동역자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사도의 권위를 가진 바울이 자신을 "기쁨의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
2

눈물의 편지와 개선 행진

용서하라는 부탁,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

2:1

사도행전에 없는 방문

"다시 근심 중에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다시 근심 중에"라는 말은 이미 한 번 근심 가운데 방문한 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방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13:1–2의 "세 번째 가리니"와 함께 보면,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낸 뒤 고린도에 짧고 아픈 방문을 한 번 더 다녀온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
2:4

잃어버린 눈물의 편지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울면서 쓴 편지는 지금 남아 있지 않습니다(10~13장이 그 편지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쓴 이유는 남아 있습니다. 꾸짖음의 목적은 상처가 아니라 사랑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깊은 묵상
2:7–8

벌보다 먼저 위로를

바울을 모욕했던 그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마땅하도다"(2:6). 이제 바울은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부탁합니다.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렵다고요. "잠기다"(καταπίνω 카타피노)는 "삼켜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고래가 요나를 삼키듯, 지나친 슬픔이 한 사람을 삼켜 버릴 수 있습니다.

8절의 "사랑을 나타내라"(κυρόω 퀴로오)는 계약을 공식적으로 확정할 때 쓰던 법률 용어입니다. 용서를 마음속으로만 하지 말고 교회가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라는 것입니다.

원어
2:11

사탄이 노리는 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속다"(πλεονεκτέω 플레오넥테오)는 "더 많이 가져가다, 이득을 챙기다"라는 말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교회는 사탄에게 이득을 내주는 셈입니다. 사탄은 죄로도 교회를 무너뜨리지만, 용서 없는 정의로도 무너뜨립니다.

원어
2:12–13

열린 문 앞에서 돌아선 바울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전도의 문이 활짝 열렸는데 바울은 그 문을 두고 떠납니다. 고린도 소식을 가지고 올 디도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사도도 사랑하는 교회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끊겼다가 7:5에서 다시 이어집니다. 그 사이 2:14부터 7:4까지가 긴 쉼표처럼 들어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드로아의 로마 항구 유적
알렉산드리아 드로아의 로마 시대 항구 터. 바울은 이 항구에서 마게도냐로 건너가는 배를 탔습니다(행 16:11). 고린도후서 2장에서는 디도를 기다리다 지쳐 다시 이곳을 떠납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2:14

로마 개선 행진 속의 바울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여기 쓰인 동사 θριαμβεύω 트리암뷰오는 로마의 "개선 행진"(트리움푸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큰 전쟁에서 이긴 장군은 전리품과 포로를 앞세우고 로마 시내를 행진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사는 보통 "누구를 개선 행진에 끌고 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을 행진하는 장군이 아니라, 승리하신 하나님께 사로잡혀 끌려가는 포로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때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 이제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어 온 세상을 끌려다니며 그분의 승리를 보여 줍니다.

티투스 개선문의 전리품 행렬 부조
로마 티투스 개선문 안쪽의 부조.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로마군이 성전의 일곱 등잔대를 메고 개선 행진을 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지 15년쯤 뒤의 일이지만, 로마 사람들에게 개선 행진은 이렇게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2:15–16

같은 향기, 다른 냄새

개선 행진 길에는 향을 피웠다고 전해집니다. 같은 향 냄새가 승리한 군인들에게는 영광의 냄새였지만, 끌려가는 포로들에게는 곧 다가올 처형의 냄새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바로 그렇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같은 복음이 누구에게는 생명의 향기로, 누구에게는 심판의 냄새로 다가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묻습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문화
2:17

포도주에 물 타는 장사꾼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혼잡하게 하다"(καπηλεύω 카펠류오)는 소매 장사꾼, 특히 포도주 장수가 하는 짓을 가리켰습니다. 칠십인역 이사야 1:22도 "네 장사꾼들이 포도주에 물을 섞었다"고 같은 계열의 단어를 씁니다.

말씀에 물을 타서 듣기 좋게 묽게 만들고, 그것으로 이익을 챙기는 설교자들이 고린도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순전한 포도주 그대로 전한다고 말합니다.

원어
3

돌판이 아니라 마음판에

새 언약의 일꾼, 그리고 모세의 수건

3:1

추천서를 들고 온 사람들

고대 세계에서는 낯선 도시에 가는 사람이 그 도시의 아는 사람에게 보내는 추천서(συστατικὴ ἐπιστολή, 쉬스타티케 에피스톨레)를 들고 가는 일이 흔했습니다. 바울도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 뵈뵈를 로마 교회에 추천했지요(롬 16:1–2).

고린도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화려한 추천서를 자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에게는 추천서가 없다고 깎아내렸겠지요. 바울은 대답합니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문화
3:3

잉크도 돌판도 아닌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두 개의 구약 약속이 겹쳐 있습니다.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 31:33), 그리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돌판처럼, 이제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직접 쓰십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쓰신 살아 있는 편지입니다.

역사
3:5–6

죽이는 글자, 살리는 영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만족"(ἱκανότης 히카노테스)은 "충분함, 자격"이라는 말입니다. 2:16에서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하고 물은 질문의 답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이 일꾼으로 "충분하게" 하십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돌판의 글자는 무엇이 옳은지 보여 줄 뿐 그대로 살 힘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
3:7

뿔 달린 모세상이 생긴 이유

바울은 출애굽기 34장을 꺼냅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출 34:29)는 장면이지요. 여기 쓰인 히브리어 קָרַן 카란은 "빛을 내다"라는 뜻인데, 명사 "케렌"은 "뿔"이라는 뜻입니다.

라틴어 성경 불가타는 이 구절을 "그의 얼굴에 뿔이 났다"(cornuta)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중세와 르네상스 화가들은 모세 머리에 뿔을 그려 넣었고,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모세상에도 작은 뿔 두 개가 솟아 있습니다. 바울은 같은 장면을 읽으며 뿔이 아니라 "없어질 영광"을 봅니다. 😄

역사
3:13

수건 뒤에 숨은 것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수건을 쓴 이유는 백성이 그 광채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출 34:30). 바울은 한 걸음 더 들어가 읽습니다. 그 영광이 "장차 없어질 것"이었고, 이스라엘이 그 "결국"(τέλος 텔로스)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썼다고요.

옛 언약의 영광은 진짜였지만 점점 희미해지는 영광이었습니다. 그 영광이 가리키던 마지막 목적지가 그리스도이십니다(롬 10:4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같은 단어 텔로스).

깊은 묵상
3:16

모세가 하던 그대로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출애굽기 34:34에서 모세는 여호와 앞에 들어가 말씀을 들을 때마다 수건을 벗었습니다. 바울은 그 장면을 거의 그대로 가져옵니다. 누구든지 모세처럼 주님께로 돌아서면, 마음에 덮인 수건이 벗겨집니다.

역사
3:17

자유가 있는 곳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3장 전체가 "수건"과 "벗겨짐"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자유(ἐλευθερία 엘류테리아)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가리개 없이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드는 자유입니다. 12절의 "담대히"(παρρησία 파레시아)와 짝을 이룹니다.

원어
3:18

고린도 청동 거울 앞에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고린도는 "고린도 청동"으로 이름난 도시였습니다. 고대의 거울은 유리가 아니라 청동을 반짝이게 닦아서 만들었지요. 고린도 사람들에게 거울은 아주 친숙한 물건이었습니다(고전 13:12).

"변화하여"(μεταμορφόομαι 메타모르포오마이)는 "메타모르포시스"(탈바꿈)의 어원으로, 예수님이 산 위에서 "변형되사"(마 17:2) 하실 때 쓰인 바로 그 단어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러" 조금씩 그분의 형상으로 바뀌어 갑니다.

고대 청동 거울
아테네 케라메이코스 박물관의 청동 거울(주후 150년경). 고린도 성도들이 매일 들여다보던 거울도 이렇게 청동을 닦아 만든 것이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화
4

질그릇에 담긴 보배

우겨 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는 사람들

4:1

지쳐서 손을 놓지 않는다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낙심하다"(ἐγκακέω 엥카케오)는 지쳐서 일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이 장은 같은 말로 시작해서(4:1) 같은 말로 다시 다짐합니다(4:16).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힘이 아니라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곧 받은 은혜 때문입니다.

원어
4:4

"이 세상의 신"

바울은 사탄을 "이 세상의 신"이라고 부릅니다. 원문은 "이 시대(αἰών 아이온)의 신"입니다. 영원한 주인이 아니라 지나가는 한 시대 동안만 힘을 부리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그가 하는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깊은 묵상
4:6

창세기 1장이 바울 안에서 다시 일어나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창세기 1:3의 "빛이 있으라"가 떠오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둠을 가르셨던 그 말씀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다시 울립니다.

바울에게 이 말은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다메섹 길에서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행 9:3) 순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다시 하시는 창조입니다(5:17).

역사
4:7

값싼 진흙 그릇 속의 보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질그릇"(ὀστράκινος 오스트라키노스)은 구운 진흙으로 만든 흔하고 값싼 그릇입니다. 깨지면 버리고 새로 사는 물건이었지요. 고대 사람들은 돈이나 귀한 문서를 일부러 이런 항아리에 넣어 숨기기도 했습니다. 사해 사본도 진흙 항아리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기드온의 용사들이 항아리 속에 횃불을 감추었다가 항아리를 깨뜨리자 빛이 드러났던 장면(삿 7:16–20)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6절의 "빛" 바로 뒤에 "질그릇"이 나오니 그럴듯한 연결이지요. 보배가 질그릇에 담긴 이유는 하나입니다.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1세기 로마의 흙으로 빚은 등잔
1세기 로마의 테라코타(구운 흙) 등잔. 바울 시대 사람들의 집에는 이렇게 흙으로 빚은 그릇과 등잔이 흔했습니다. 값싸고 잘 깨지는 그릇 안에 빛이 담겨 있었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문화
4:8–9

헬라어로 들으면 더 재미있는 대구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네 쌍의 대구가 이어집니다.

그중 둘째 쌍은 원문에서 말놀이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다"는 ἀπορούμενοι 아포루메노이, "낙심하다"는 거기에 "완전히"(엑스)를 붙인 ἐξαπορούμενοι 엑사포루메노이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길이 막혀도 아주 막히지는 않는다"쯤 되지요. 막힌 길 끝에도 하나님은 출구를 남겨 두십니다.

원어
4:10–11

몸에 짊어진 예수님의 죽음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칭호보다 "예수"라는 이름을 거듭 씁니다. 10~14절 사이에 여섯 번이나 나오지요. 실제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역사 속의 그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
4:13

고난 속에서 부른 시편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시편 116:10의 칠십인역 인용입니다. 시편 116편은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시 116:3)라고 고백하다가 건짐 받은 사람의 감사 찬송입니다. 1장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 같았다던 바울의 처지와 꼭 겹칩니다.

역사
4:16

낡아 가는 겉, 새로워지는 속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낡아지다"(διαφθείρω 디아프테이로)는 옷이 해지고 몸이 쇠하는 것을 말합니다. 고난과 세월은 겉사람을 갉아먹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 동안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거울 앞에서 주름을 세는 날에도 하나님은 속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깊은 묵상
4:17

무게와 영광의 말놀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히브리어로 "영광"(כָּבוֹד 카보드)은 원래 "무게, 무거움"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인 바울은 영광을 무게로 생각했습니다.

저울 한쪽에는 "잠시"이고 "가벼운" 환난이, 다른 쪽에는 "영원"하고 "무거운" 영광이 올라갑니다. 11장에 나오는 그 엄청난 고난 목록을 겪은 사람이 그것을 "가볍다"고 말합니다. 비교 대상이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

원어
4:18

보이는 것은 잠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잠깐"(πρόσκαιρος 프로스카이로스)은 "한때뿐인"이라는 뜻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넘어지는 사람에게 쓰인 단어이기도 합니다(마 13:21). 눈에 보이는 고난도, 보이는 성공도 모두 한때뿐입니다.

깊은 묵상
5

장막 집과 새 피조물

천막 짓던 사도의 소망, 그리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

5:1

천막 만드는 사람이 쓴 문장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바울은 천막 만드는 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고린도에서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천막을 지었지요(행 18:3).

날마다 천막을 꿰매고 기우던 사람이니, 천막이 얼마나 쉽게 해지고 바람에 찢기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우리 몸은 잠시 치고 걷는 천막이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집은 무너지지 않는 집입니다.

문화
5:2–4

벗고 싶은 것이 아니라 덧입고 싶은 것

"우리가 참으로 이 장막에 있어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헬라 철학자들 가운데는 몸을 영혼의 감옥으로 보고, 죽어서 몸을 벗어 버리는 것을 해방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바울의 소망은 다릅니다. 몸에서 벗어나 떠도는 영혼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덧입는" 것입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2장에서 근심이 사람을 "삼킬까" 걱정했던 그 단어가, 여기서는 생명이 죽음을 삼켜 버리는 데 쓰입니다.

깊은 묵상
5:7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법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4:18의 "보이지 않는 것"이 여기서 걸음이 됩니다. 앞이 다 보여서 걷는 것이 아니라, 앞서 가시는 분을 믿기 때문에 걷습니다.

깊은 묵상
5:8

이사 가는 사람의 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몸을 떠나다"(ἐκδημέω 에크데메오)와 "함께 있다"(ἐνδημέω 엔데메오)는 원래 "외국으로 떠나다", "고향에 머물다"라는 말입니다. 바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고향 집으로 이사 가는 일입니다.

원어
5:10

고린도 광장의 재판석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심판대"(βῆμα 베마)는 고린도 사람들이 눈으로 보던 실제 건축물이었습니다. 고린도 광장 한가운데에는 높이 쌓은 돌 연단, 베마가 있었고, 총독이 거기 앉아 재판을 했습니다.

몇 해 전 바울도 바로 그 베마 앞에 끌려가 갈리오 총독에게 재판을 받았습니다(행 18:12–17). 갈리오는 사건을 각하했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보다 더 큰 재판석을 바라봅니다. 모든 사람이 서게 될 그리스도의 베마입니다.

고린도 광장의 베마 유적
고대 고린도 로마 광장의 베마(연단) 유적. 바울이 갈리오 총독 앞에 섰던 곳으로 여겨집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라는 말을 들으며 이 돌 연단을 떠올렸을 것입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5:13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미쳤다"(ἐξίστημι 엑시스테미)는 "제정신에서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가족들에게서 "미쳤다"(막 3:21, 같은 단어)는 말을 들으셨고, 바울도 베스도 총독에게서 "네가 미쳤도다"(행 26:24)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은 종종 세상의 눈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입니다.

원어
5:14

사방에서 꽉 붙드는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강권하다"(συνέχω 쉬네코)는 사방에서 꽉 죄어 붙든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싸 밀었다"(눅 8:45), 예수님이 십자가의 침례를 앞두고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하실 때 쓰였습니다. 바울을 움직인 것은 의무감이 아니라, 빠져나갈 수 없게 그를 감싸 안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원어
5:16

더는 겉모습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한때 바울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겉모습과 세상의 기준으로 본 것이지요. 그 눈이 바뀌자 사람을 보는 눈도 바뀌었습니다. 출신과 말솜씨로 사람을 재던 고린도에 꼭 필요한 말이었습니다.

깊은 묵상
5:17

이사야가 기다리던 새 창조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원문에는 동사가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창조!" 하고 감탄하듯 끝납니다.

이사야는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사 43:18–19),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사 65:17)라고 예언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하실 새 창조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역사
5:18–19

누가 누구와 화해하는가

"화목하게 하다"(καταλλάσσω 카탈라쏘)는 "바꾸다"(알라쏘)에서 온 말로, 원래 돈을 바꿔 주는 일, 그리고 원수 사이를 바꿔 친구로 만드는 일을 가리켰습니다.

당시 종교에서는 화가 난 신을 사람이 제물로 달래서 화해하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유대 문헌인 마카베오하에도 하나님이 백성과 "화해하시기를" 비는 기도가 나옵니다(마카베오하 1:5). 그런데 바울의 문장은 방향이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화해를 먼저 청하신 분이 상처받으신 하나님 쪽입니다.

원어
5:20

하늘 나라의 대사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사신"(πρεσβεύω 프레스뷰오)은 황제나 도시를 대신해 말하는 대사를 가리켰습니다. 로마 동쪽 지방에서는 황제의 공식 대리인을 같은 계열의 말로 불렀습니다. 대사는 자기 생각이 아니라 보낸 분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하는 왕의 메시지는 명령이 아니라 간청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라."

문화
5:21

루터가 "즐거운 교환"이라 부른 구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지고, 죄인인 우리가 그분의 의를 입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1520년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이것을 신랑과 신부의 결혼에 빗대었습니다. 결혼하면 신랑의 재산은 신부의 것이 되고 신부의 빚은 신랑의 것이 되듯,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것을 "즐거운 교환"이라고 불렀습니다.

역사
6

지금은 은혜 받을 때

역설로 가득한 일꾼의 삶, 그리고 넓어진 마음

6:2

이사야의 "그날"이 "오늘"이 되다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이사야 49:8의 인용입니다. 원래 포로에서 돌아올 날을 약속하는 말씀이었지요. 바울은 이어서 덧붙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선지자가 먼 미래로 바라보던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선포입니다.

역사
6:4–5

세 번씩 묶은 고난 목록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많이 견디는 것" 뒤로 아홉 가지가 이어지는데, 잘 보면 셋씩 묶여 있습니다. 상황의 고난(환난, 궁핍, 고난), 사람에게서 받은 고난(매 맞음, 갇힘, 난동), 스스로 감당한 고난(수고, 자지 못함, 먹지 못함).

당시 철학자들도 현자가 견딘 고난 목록을 자랑삼아 늘어놓곤 했습니다. 바울은 그 형식을 빌려 쓰되, 자기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견딘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어
6:8–10

"같으나"의 일곱 고백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세상이 보는 바울과 하나님이 보시는 바울이 짝을 지어 나란히 섭니다. 마지막 줄은 바울이 유난히 좋아한 역설입니다. 빈손인데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리스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깊은 묵상
6:11

넓어진 마음, 좁아진 마음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바울이 편지에서 수신자 이름을 직접 부르는 일은 드뭅니다(갈 3:1, 빌 4:15 정도). 그만큼 간절한 대목이지요.

"마음이 넓어졌다"는 시편 119:32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의 마음은 넓어졌는데, 고린도 사람들의 마음은 "좁아졌습니다"(6:12). 바울은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6:13)고 부탁합니다. 자녀에게 말하듯이요.

역사
6:14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메지 말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멍에를 함께 메다"(ἑτεροζυγέω 헤테로쥐게오)는 "다른 종류와 한 멍에를 메다"라는 뜻으로,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배경은 신명기 22:10입니다.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키도 힘도 걸음도 다른 두 짐승을 한 멍에에 매면 밭고랑은 비뚤어지고 둘 다 지칩니다. 바울은 믿는 사람이 삶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결합에서 다른 길을 가는 사람과 한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합니다.

문화
6:15

사해 사본에 자주 나오는 이름, 벨리알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벨리알"은 히브리어로 "쓸모없음, 무가치함"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불량배"(삼상 2: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원문 "벨리알의 아들들")를 가리킬 때 쓰였습니다.

신약에서는 이곳에만 나오지만,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에서는 악의 우두머리를 부르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전쟁"을 그린 『전쟁 문서』에서 어둠의 편을 이끄는 존재가 벨리알입니다. 바로 앞 절의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와 꼭 맞아떨어집니다.

역사
6:16

우상의 신전 옆에서 "우리는 성전"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고린도에는 아폴론, 아프로디테, 포세이돈 신전과 황제 숭배 신전이 즐비했습니다. 바울은 레위기 26:12와 에스겔 37:27의 약속을 엮어 인용합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이 사시는 곳은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입니다.

역사
6:18

바울이 덧붙인 두 글자, "딸들"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바울이 인용한 본문은 사무엘하 7:14, 다윗의 후손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런데 바울은 이 약속을 "너희"로 넓히고, 원문에는 "아들과 딸이 되리라"고 "딸들"을 덧붙입니다. 이사야 43:6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를 함께 엮은 것으로 보입니다. 왕의 아들 한 사람에게 주신 약속이 이제 남녀노소 모든 성도에게 주어졌습니다.

깊은 묵상
7

경건한 근심이 낳은 기쁨

디도가 가져온 소식, 그리고 다시 이어진 마음

7:2–3

함께 죽고 함께 살기로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고대 세계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말은 가장 깊은 우정을 맹세할 때 쓰던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의심하던 교회를 향해 생사를 함께하는 친구의 맹세를 합니다.

깊은 묵상
7:5

2장에서 끊긴 이야기가 이어지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2:13에서 "마게도냐로 갔노라" 하고 멈췄던 이야기가 다섯 장을 건너 여기서 이어집니다.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바울이 세운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였습니다. 그곳도 박해가 끊이지 않던 곳이었지요(살전 2:14). 밖으로는 싸움, 안으로는 두려움. 사도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었습니다.

빌립보 광장 유적
마게도냐 빌립보의 로마 광장 유적. 바울은 마게도냐 어딘가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소식을 듣고 이 편지를 썼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7:6

낮아진 사람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낙심한 자"(ταπεινός 타페이노스)는 "낮은, 납작 엎드린"이라는 말입니다. 칠십인역 이사야 49:13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의 울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는 대신, 먼 길을 걸어온 친구 디도의 얼굴로 바울을 위로하셨습니다. 1장의 "위로의 하나님"이 여기서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원어
7:8

보내 놓고 후회했던 편지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지 아니함은 후회하였으나". 바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눈물의 편지를 보낸 뒤 바울은 "너무 심했나" 하고 후회했습니다. 그러다 그 편지가 교회를 회개로 이끌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후회를 내려놓습니다. 큰 사도도 보낸 편지 때문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깊은 묵상
7:10

두 종류의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회개"(μετάνοια 메타노이아)는 생각과 방향이 바뀌는 것이고, "후회"(μεταμέλεια와 같은 계열)는 지난 일을 두고 마음이 쓰린 것입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가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베드로는 통곡한 뒤 돌아왔고, 유다는 "뉘우쳤으나"(마 27:3, 메타멜로마이)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같은 눈물이라도 하나님께로 향하면 생명이 되고, 나 자신에게만 머물면 사망이 됩니다.

원어
7:11

회개가 낳은 일곱 가지 열매

"얼마나 너희로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얼마나"가 원문에서 하나로 시작해 일곱 가지 열매가 쏟아집니다. 진짜 회개는 마음 한 번 아프고 끝나지 않고, 삶 전체를 움직이게 합니다.

깊은 묵상
7:14

디도 앞에서 세운 체면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바울은 디도를 보내기 전에 "고린도 사람들은 결국 바른길로 돌아올 거야" 하고 장담해 두었던 모양입니다. 교회가 바울의 체면을 살려 주었습니다. 😄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자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목회의 기쁨입니다.

역사
8

가난한 교회의 넉넉한 연보

예루살렘을 위한 연보, 그리고 부요하신 이의 가난

8:1–2

예루살렘을 위한 큰 연보

8~9장은 바울이 여러 해 동안 이방 교회들에게서 모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이야기입니다(롬 15:25–27, 고전 16:1–4). 기근과 가난에 시달리던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일이었지만, 바울에게는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가 한 몸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마게도냐 교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극심한 가난"에 있었는데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했습니다. 부자 도시 고린도에 가난한 이웃 교회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입니다.

역사
8:2

한 겹의 마음이 넉넉함이 되다

"넘치도록 풍성한 연보를 하게 하였느니라". "풍성한 연보"로 옮긴 말은 ἁπλότης 하플로테스로, 원래 "한 겹, 단순함"이라는 뜻입니다. 계산하고 재는 두 마음이 아니라, 겉과 속이 같은 한 마음. 그 단순한 마음에서 넉넉한 나눔이 나왔습니다. 바울은 9:11, 13에서도 같은 단어를 씁니다.

원어
8:4

내게도 끼워 달라고 조른 사람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보통은 모금하는 사람이 부탁하는데, 마게도냐 성도들은 거꾸로 "우리도 참여하게 해 달라"고 바울에게 졸랐습니다. 바울이 가난한 그들을 사양했을 수도 있겠지요.

"참여함"은 κοινωνία 코이노니아, 곧 "교제, 함께 나눔"입니다. 그들에게 연보는 빼앗기는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들어가는 특권이었습니다.

원어
8:5

돈보다 먼저 드린 것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주님께 드렸고, 그다음에 손에 든 것을 드렸습니다. 연보는 이미 주님께 드려진 사람이 자연스럽게 내미는 손입니다.

깊은 묵상
8:9

거지처럼 가난해지신 부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헬라어에는 "가난"을 뜻하는 말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일해서 겨우 먹고사는 가난(πένης 페네스)과, 아무것도 없어 구걸해야 하는 가난(πτωχός 프토코스)입니다.

여기 쓰인 "가난하게 되다"(πτωχεύω 프토큐오)는 뒤쪽입니다. 하늘의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 거지처럼 빈손이 되셨습니다. 마구간에서 나시고 머리 둘 곳도 없으셨으며, 마지막에는 입으신 옷마저 제비 뽑혀 나뉘었습니다. 바울은 연보를 이야기하다가 성육신과 십자가로 들어갑니다. 우리의 나눔은 그분의 가난에서 시작됩니다.

원어
8:12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대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은 남과 비교한 액수를 보지 않으십니다. 과부의 두 렙돈을 칭찬하신 예수님처럼(막 12:42–44), 가진 것 안에서 드리는 마음을 보십니다.

깊은 묵상
8:13–15

광야의 만나 바구니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출애굽기 16:18의 인용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거둘 때, 많이 거둔 사람도 적게 거둔 사람도 오멜로 되어 보니 각자 먹을 만큼이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나눔을 만나에 빗댑니다. 지금 고린도의 넉넉함이 예루살렘의 부족을 채우면, 언젠가 예루살렘의 넉넉함이 고린도의 부족을 채울 것입니다.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ἰσότης 이소테스). 하나님의 백성은 한 광야를 함께 걷는 한 가족입니다.

역사
8:16–18

이름 없는 칭찬받는 형제

바울은 연보를 맡을 사람으로 디도와 함께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한 형제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누군지 알았겠지만 우리는 알 수 없지요.

오리게네스와 히에로니무스 같은 교부들은 이 사람을 누가로 보았습니다. 여기 "복음"을 그가 쓴 "누가복음"으로 읽은 것인데, 이 편지를 쓸 때 누가복음은 아직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서 근거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바나바, 실라, 아볼로 등 여러 이름이 거론되지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역사
8:20–21

헌금은 투명하게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21절은 칠십인역 잠언 3:4에서 온 표현입니다.

바울은 큰돈을 혼자 다루지 않았습니다. 여러 교회가 뽑은 사람들과 함께 다녔지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 않고, 사람들 눈에도 의심받을 일이 없게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재정의 원칙이 이미 여기 있습니다.

깊은 묵상
9

즐겨 내는 사람

심는 대로 거두는 나눔,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선물

9:2–4

자랑해 놓고 걱정하는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아가야는 작년부터 준비되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 자랑을 듣고 마게도냐 교회가 분발했지요. 그런데 막상 마게도냐 사람들을 데리고 고린도에 갔는데 연보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양쪽 교회를 서로 자랑하며 응원하던 바울이 진땀 흘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 그래서 형제들을 먼저 보내 미리 준비하게 합니다.

역사
9:5

복이 되는 연보, 억지로 걷는 돈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개역개정이 "연보"로 옮긴 말은 εὐλογία 율로기아, 곧 "복, 축복"입니다. 그 반대말로 쓴 "억지"(πλεονεξία 플레오넥시아)는 "탐욕, 더 가지려는 욕심"입니다. 바울은 연보가 사람들에게서 쥐어짜 내는 돈이 아니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복이 되는 선물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원어
9:6

농부의 셈법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씨앗을 아끼는 농부는 손해를 보지 않는 것 같지만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잠언 11:24도 말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나눔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심는 것입니다.

깊은 묵상
9:7

하나님은 "하일라리어스"한 사람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즐겨 내는"(ἱλαρός 힐라로스)은 영어 "hilarious"(아주 유쾌한)의 어원입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찡그리며 내는 헌금보다, 웃으며 내미는 손을 기뻐하십니다.

이 문장은 칠십인역 잠언 22:8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지만 칠십인역에는 "하나님은 즐거워하며 주는 사람을 축복하신다"는 구절이 덧붙어 있습니다. 바울은 "축복하신다"를 "사랑하신다"로 바꾸어 인용합니다.

원어
9:9–10

씨를 주시는 분이 양식도 주신다

9절은 시편 112:9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를, 10절은 이사야 55:10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나눌 씨앗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그 씨앗을 자라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손에 쥐여 주신 것을 다시 밭에 뿌리는 사람일 뿐입니다.

역사
9:12

부자들이 맡던 도시의 봉사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봉사"(λειτουργία 레이투르기아)는 그리스 도시에서 부유한 시민이 자기 돈으로 공공의 일을 떠맡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축제 비용이나 군함 비용을 대는 일이었지요. 이 단어가 나중에 교회 예배를 뜻하는 "리터지"(전례)가 됩니다.

고린도에서는 부자들이 이런 봉사로 이름을 내고 비문을 남겼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작은 연보를 같은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름이 새겨진 비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입니다.

문화
9:15

말로 다 할 수 없는 선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두 장에 걸쳐 연보를 이야기하던 바울은 갑자기 펜을 멈추고 감사를 터뜨립니다. "말할 수 없는"(ἀνεκδιήγητος 아넥디에게토스)은 "끝까지 다 설명할 수 없는"이라는 뜻으로,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옵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연보는 먼저 받은 선물, 곧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작은 대답입니다.

원어
10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무기

얕보이던 사도의 대답

10:1

상대방 말을 그대로 따라 하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10장은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바울은 자기를 깎아내리던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합니다. "얼굴 보면 순한 양이고, 멀리서 편지로만 큰소리친다"는 비아냥이었지요.

그런데 그 대답의 시작이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입니다. "관용"(ἐπιείκεια 에피에이케이아)은 법을 끝까지 따지기보다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앞세웁니다.

원어
10:4

아크로고린도 요새를 바라보며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견고한 진"(ὀχύρωμα 오퀴로마)은 성채, 요새를 뜻합니다. 칠십인역 잠언 21:22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 허느니라"에도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매일 도시 뒤편에 솟은 바위산 아크로고린도를 올려다보며 살았습니다. 해발 약 570m의 이 산 꼭대기에는 그리스에서 손꼽히는 요새가 있었지요. 바울은 사람의 교만과 생각이 쌓아 올린 요새가 아무리 높아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아크로고린도 바위산
고대 고린도 뒤편에 솟은 아크로고린도. 꼭대기의 요새는 고대부터 중세까지 여러 나라가 차지하려고 다툰 곳이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견고한 진"이라는 말을 들으며 이 산을 떠올렸을 것입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10:5

생각을 포로로 잡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사로잡다"(αἰχμαλωτίζω 아이크말로티조)는 전쟁에서 포로를 잡아 끌고 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새를 무너뜨리고, 그 안에 숨어 있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포로로 잡아 그리스도 앞으로 데려가는 그림이지요. 신앙은 마음만이 아니라 생각까지 그리스도께 데려가는 일입니다.

원어
10:10

편지는 무겁고 몸은 약하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말솜씨와 풍채로 사람을 평가하던 고린도에서 바울은 볼품없는 연사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2세기에 쓰인 외경 『바울과 테클라 행전』은 바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키가 작고, 머리가 벗어지고, 다리가 휘었고, 눈썹이 붙었고, 코가 조금 매부리코인데, 은혜가 가득해서 어떤 때는 사람처럼 보이고 어떤 때는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고요. 성경이 아니라 후대의 전승이지만, 바울을 "약해 보이는 사람"으로 기억한 전통이 있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 『바울과 테클라 행전』은 성경이 아닌 2세기 외경으로, 바울의 외모 묘사는 역사적 사실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역사
10:12

자기를 자로 삼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자기 키에 맞춘 자로 자기 키를 재면 언제나 딱 맞습니다. 그러니 늘 만족스럽지요. 바울은 그런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재는 자는 오직 주님이십니다.

깊은 묵상
10:13

"정경"이라는 단어의 출발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범위"(κανών 카논)는 원래 곧은 갈대 막대, 곧 길이를 재는 자를 뜻했습니다. 거기서 "기준", "맡겨진 구역"이라는 뜻이 나왔지요.

훗날 교회는 신앙의 기준이 되는 책들의 목록을 이 단어로 불렀습니다. 그것이 "정경"(캐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재어 맡겨 주신 구역 안에서만 일하고, 남이 세운 밭에 들어가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원어
10:17

예레미야의 한 줄, 두 번 인용되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예레미야 9:24의 요약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에서도 같은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자랑이 많은 도시에 보낸 두 편지에 같은 구절이 두 번 나옵니다. 고린도 교회에 그만큼 필요한 말씀이었던 것이지요.

역사
11

어리석은 자의 자랑

거짓 사도들 앞에서 내놓은 이상한 이력서

11:2

신부를 데려가는 아버지의 마음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당시 유대 결혼에서는 약혼과 결혼식 사이에 긴 기간이 있었고, 그동안 신부 아버지는 딸을 순결하게 지키다가 결혼식 날 신랑에게 데려가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신부 아버지에 빗댑니다. 고린도 교회를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 약혼시켜 놓았는데, 결혼식 날까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애태웁니다.

문화
11:3

에덴의 뱀이 다시 하는 말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창 3:1) 하고 살짝 비틀었지요. 고린도의 거짓 교사들도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11:4)을 그럴듯하게 들고 왔습니다.

역사
11:5

"슈퍼 사도들"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ὑπερλίαν ἀπόστολοι, 휘페를리안 아포스톨로이)은 "넘치게 아주"라는 말을 붙인, 일부러 과장한 표현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슈퍼 사도님들"쯤 됩니다. 😄 스스로 대단하다고 내세우던 사람들을 바울은 살짝 비꼬아 부릅니다(12:11에도 나옵니다).

원어
11:7–9

공짜로 전한 것이 죄가 되다니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고 천막을 만들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족한 것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채웠지요(빌 4:15–16 참고). 그런데 고린도에서는 이것이 오히려 흠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름 있는 철학 선생은 높은 사례를 받았으니, 돈을 받지 않는 선생은 실력이 없거나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고 여겨진 것입니다.

바울은 씁쓸하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역사
11:14

빛의 천사 가면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가장하다"(μετασχηματίζω 메타스케마티조)는 겉모양만 바꾸는 것입니다. 3:18의 "변화하다"(메타모르포오)가 속까지 바뀌는 변화라면, 이것은 의상만 갈아입는 변장입니다. 밝은 얼굴과 화려한 말솜씨가 곧 빛은 아닙니다.

원어
11:16–21

바보 연기로 시작하는 연설

"나도 조금 자랑하려 하니… 어리석은 자의 자랑". 여기서부터 12:13까지를 학자들은 "바보의 연설"이라고 부릅니다. 고대 극장에는 바보 역할을 하며 진실을 툭툭 내뱉는 광대가 있었지요. 바울은 자랑하기 싫어하면서도, 거짓 사도들의 자랑 경쟁에 끌려 들어가 일부러 바보 역할을 맡습니다.

20절의 비꼼이 날카롭습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그러고는 한마디. "부끄럽게도 우리가 약한 것 같이 말하노라." 우리는 너희 뺨을 칠 만큼 강하지 못했다고요.

문화
11:22

혈통 경쟁에 답하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거짓 사도들은 유대 혈통을 내세웠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빌 3:5)이었으니 그 경쟁에서 질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러나 바울은 곧 다른 이력서를 꺼냅니다.

역사
11:23

사도행전보다 훨씬 긴 고난 목록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편지를 쓰기 전까지 바울이 옥에 갇힌 일로 빌립보 한 번만 기록합니다(행 16:23).

그런데 바울은 "더 많이" 갇혔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매 맞음, 파선, 위험 목록도 대부분 사도행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고난 가운데 아주 일부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감옥 속 바울
렘브란트가 1627년에 그린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 바울은 여러 번 옥에 갇혔지만, 그 대부분은 어디서 언제 일어났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11:24

사십에 하나 감한 매, 다섯 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신명기 25:3은 매를 "사십까지는 때리려니와 그것을 넘기지는 못할지니"라고 정합니다. 유대인들은 혹시 세다가 실수로 마흔을 넘길까 봐 서른아홉 대에서 멈추었습니다. 미쉬나(유대 구전 율법 모음)의 『마코트』에도 서른아홉 대로 정해져 있습니다.

회당의 징계를 다섯 번 받았다는 것은, 바울이 쫓겨날 때까지 계속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9 × 5 = 195대. 바울의 등에는 동족을 향한 사랑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습니다(롬 9:3).

역사
11:25

로마 시민이 맞은 몽둥이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태장"은 로마 관리를 수행하던 릭토르들이 들고 다니던 막대 묶음으로 때리는 형벌입니다. 원래 로마 시민에게는 재판 없이 이런 매를 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에서 바울이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렸다"고 따지자 관리들이 두려워했지요(행 16:37–38).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은 빌립보의 한 번뿐입니다. 나머지 두 번은 어디서 맞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 번 돌로 맞고"는 루스드라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려진 사건입니다(행 14:19).

파스케스를 든 로마 릭토르
막대 묶음(파스케스)을 어깨에 멘 로마 릭토르의 모습. 관리를 수행하던 이들이 이 막대로 매를 쳤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는데도 이 매를 세 번 맞았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11:25

멜리데 파선보다 앞선 세 번의 파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의 파선은 사도행전 27장, 로마로 가던 길에 멜리데 섬에서 배가 부서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이 편지를 쓰고 몇 년 뒤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이미 세 번이나 파선을 겪었고, 한 번은 꼬박 하루 밤낮을 바다에 떠서 버텼습니다. 그런 사람이 또 배에 올랐습니다. 멜리데 파선까지 합치면 적어도 네 번입니다.

폼페이 벽에 새겨진 상선 그림
폼페이의 한 집 벽에 긁어 새긴 대형 상선 그림. 바울이 탔던 배들도 이런 돛단배였습니다. 바람이 바뀌면 속수무책이었지요.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11:26

여덟 번 되풀이한 "위험"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위험"(κίνδυνος 킨뒤노스)이 여덟 번 북소리처럼 울립니다.

소아시아의 산길에는 실제로 강도가 많았고, 다리가 없는 강을 건너다 물살에 휩쓸리는 일도 흔했습니다. 그런데 목록의 마지막은 "거짓 형제"입니다. 강도와 물살보다 더 아픈 위험은 교회 안에서 왔습니다.

원어
11:28–29

몸의 고난보다 무거운 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매와 파선과 굶주림을 다 나열한 뒤에 바울이 꼽은 가장 무거운 짐은 교회를 향한 걱정이었습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 성도 한 사람이 넘어지면 바울의 마음이 함께 탔습니다.

깊은 묵상
11:32–33

광주리를 타고 내려온 자랑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아레다 왕은 나바테아 왕국(오늘날 요르단의 페트라가 수도)의 아레타스 4세로, 주전 9년부터 주후 40년경까지 다스렸습니다. 성경 밖 역사와 꼭 맞아떨어지는 이름입니다.

로마 군대에는 적의 성벽을 맨 먼저 기어오른 병사에게 주는 "성벽관"(코로나 무랄리스)이라는 훈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장면을 일부러 뒤집은 자랑으로 읽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벽을 맨 먼저 올라간 것을 자랑하는데, 바울은 바구니에 담겨 성벽을 내려간 것을 자랑합니다. 자랑 목록의 마지막이 영웅담이 아니라 도망친 이야기입니다.

다메섹 밥 키산 성문의 성 바울 기념 예배당
다메섹 옛 성벽의 밥 키산 문에 세워진 성 바울 기념 예배당.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간 곳을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지금의 성벽은 후대에 다시 쌓은 것이어서 정확한 장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역사
12

셋째 하늘과 육체의 가시

가장 높은 체험과 가장 깊은 약함

12:2

"그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바울은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3인칭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7절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은 바울 자신입니다. 자랑하기 싫어서 남의 이야기처럼 슬쩍 비켜 말한 것이지요.

이 편지를 주후 55~56년경에 썼다면 14년 전은 40년대 초입니다. 바울이 회심 후 고향 다소에 머물며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시간을 보내던 무렵으로 봅니다(행 9:30, 11:25).

역사
12:2–4

셋째 하늘과 낙원

유대인들은 하늘을 여러 층으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새가 나는 하늘, 별이 있는 하늘,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 바울이 말한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가장 높은 곳을 가리킵니다. 4절에서는 같은 곳을 "낙원"이라고 부릅니다.

"낙원"(παράδεισος 파라데이소스)은 원래 페르시아어로 "담을 두른 왕의 정원"이었습니다. 칠십인역은 에덴동산을 이 단어로 옮겼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한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하신 바로 그곳입니다.

문화
12:4

들었지만 말할 수 없는 말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서 본 것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 묵시 문학들은 하늘 여행 이야기를 길고 화려하게 늘어놓곤 했는데, 바울은 단 몇 줄로 끝냅니다. 그리고 곧바로 "약함"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바울이 정말 자랑하고 싶은 것은 그쪽이었기 때문입니다.

원어
12:7

가시일까, 말뚝일까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가시"(σκόλοψ 스콜롭스)는 작은 가시를 뜻하기도 하지만, 뾰족한 말뚝이나 끝을 깎은 장대를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고통이 손가락에 박힌 가시 정도가 아니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치다"(κολαφίζω 콜라피조)는 주먹으로 때린다는 말인데, 대제사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먹으로 치던"(마 26:67) 장면에 쓰인 단어입니다.

원어
12:7

2천 년 동안 풀리지 않은 질문

바울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추측이 나왔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성도들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갈 4:15) 했고, 바울이 "큰 글자로" 썼다고 한 것(갈 6:11)을 근거로 눈병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라리아 같은 열병, 심한 두통, 뇌전증, 또는 바울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던 반대자들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은혜일지도 모릅니다. 덕분에 저마다 다른 가시를 지닌 성도들이 이 구절에서 자기 이야기를 읽을 수 있으니까요.

※ 가시의 정체에 대한 설명은 모두 추정이며, 성경은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역사
12:8

세 번의 기도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도 같은 기도를 세 번 하셨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44). 예수님의 잔도 지나가지 않았고, 바울의 가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 기도 모두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더 큰 뜻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응답되었습니다.

깊은 묵상
12:9

지금도 넉넉한 은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족하다"(ἀρκεῖ 아르케이)는 현재형입니다. "언젠가 넉넉해질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이미 넉넉하다"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 고백이 고린도후서 전체의 열쇠입니다. 바울이 1장부터 지금까지 자기 약함과 고난을 그렇게 많이 털어놓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원어
12:9

내 위에 장막을 치시는 능력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머물다"(ἐπισκηνόω 에피스케노오)는 "위에 장막을 치다"라는 뜻으로,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 위에 머물렀던 장면(출 40:34)이 떠오르고,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장막을 치시매)와도 뿌리가 같습니다.

5장에서 바울은 우리 몸을 쉽게 무너지는 "장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낡은 천막 위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또 하나의 장막을 치고 머무십니다.

원어
12:10

약할 그때에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약함이 강함으로 바뀐다는 말이 아니라, 약한 바로 "그때에" 강하다는 말입니다. 내 힘이 바닥나는 자리가 그리스도의 능력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깊은 묵상
12:13

"이 불공평을 용서하라"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 사례비를 받지 않은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바울은 웃지 못할 농담처럼 사과합니다. 😄 "내가 너희 돈을 안 받은 불공평을 용서해 주시오." 섭섭함과 사랑이 한 문장에 섞여 있습니다.

깊은 묵상
12:14–15

부모가 자녀를 위해 모으는 것처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세 번째 가려고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부모로 여깁니다(고전 4:15). 그리고 덧붙입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사랑을 덜 받더라도 더 사랑하겠다는 부모의 고백입니다.

문화
12:16

"교활한 바울"이라는 소문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직접 돈을 받지 않은 것은 연보를 핑계로 더 큰 돈을 챙기려는 속셈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던 모양입니다. "교활한"(πανοῦργος 파누르고스)은 "무엇이든 하는 자", 곧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디도와 형제들을 증인으로 세웁니다(12:17–18). 8장에서 연보를 그렇게 투명하게 다룬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원어
12:20–21

바울이 두려워한 것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바울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매나 파선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회에 가서 여전히 다투고 수군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21절에서는 "하나님이 나를 낮추실까" 두렵다고까지 말합니다.

깊은 묵상
13

세 번째 방문을 앞두고

마지막 경고,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축복

13:1

세 번의 방문, 세 명의 증인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사람마다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신명기 19:15의 인용입니다. 무슨 일이든 두세 증인이 있어야 확정한다는 율법이지요.

바울은 자기의 세 번 방문을 세 명의 증인처럼 세웁니다. 첫 방문 때 교회를 세웠고, 두 번째 방문 때 미리 경고했고(13:2), 이제 세 번째로 가서 확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역사
13:4

약함으로 십자가에, 능력으로 살아나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고린도후서 전체가 이 한 절에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의 약함이 부활의 능력으로 이어지듯, 바울의 약함도 하나님의 능력이 흐르는 통로입니다.

깊은 묵상
13:5

시험대에 오를 사람은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이 진짜 사도인지 "증거"(13:3)를 대 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 질문을 돌려줍니다. "확증하다"(δοκιμάζω 도키마조)는 금속을 불에 넣어 진짜인지 가려내는 말이고, "버림 받은 자"(ἀδόκιμος 아도키모스)는 시험에서 떨어진 가짜 동전을 가리킵니다. 남을 시험하기 전에 나를 먼저 불 속에 넣어 보라는 것입니다.

원어
13:9

너희가 강해진다면 나는 약해도 좋다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지금까지 자기가 진짜 사도라고 변론하던 바울의 진심이 여기서 나옵니다. 자기가 이기는 것보다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깊은 묵상
13:11

찢어진 그물을 깁듯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온전하게 되다"(καταρτίζω 카타르티조)는 어부들이 "그물을 깁는"(막 1:19) 일에 쓰인 말입니다. 9절의 "온전하게 되는 것"과도 같은 뿌리입니다. 여기저기 찢어졌던 교회가 다시 기워지는 그림이지요.

"위로를 받으며"는 1장에서 그렇게 많이 나온 그 "위로"입니다. 위로로 시작한 편지가 위로로 마무리됩니다.

원어
13:12

거룩한 입맞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당시 가족끼리 나누던 인사를 교회는 형제자매의 인사로 나누었습니다. 2세기 중엽 유스티누스는 예배에서 기도를 마친 뒤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하고 성찬으로 나아갔다고 기록합니다(『첫째 변증』 65장). 서로 다투던 고린도 교회가 이 인사를 나누려면 먼저 화해해야 했겠지요.

문화
13:13

오늘도 예배 끝에 듣는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성경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한 문장에 함께 부르는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많은 교회가 예배를 마칠 때 이 말씀으로 축도를 합니다.

순서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먼저 놓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성령 안에서 그 사랑을 함께 나눕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12절이 둘로 나뉘어 있어서 이 구절이 13:14입니다.

역사
後

그 후의 고린도

편지가 도착한 다음 이야기

바울은 예고한 대로 세 번째로 고린도를 찾아갔습니다. 사도행전 20:2–3은 바울이 헬라(그리스)에 이르러 석 달을 머물렀다고 기록합니다. 그 겨울,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며 로마서를 썼습니다. 로마서 끝에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와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가 문안하는 것을 보면(롬 16:23), 바울은 그토록 애태우던 교회 안에서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던 것 같습니다.

9장에서 바울이 걱정하던 연보도 결국 모였습니다. 로마서 15:26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라고 씁니다. 아가야, 곧 고린도가 그 이름 안에 들어 있습니다. 눈물과 오해와 변론으로 가득했던 편지가 결국 화해와 나눔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고린도 아폴론 신전 유적
고대 고린도의 아폴론 신전 유적. 바울이 걸었던 도시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 도시에 보낸 편지들은 지금도 전 세계 교회에서 읽힙니다.사진: Wikimedia Commons · 촬영자·라이선스 보기 ↗

약함을 자랑한 사도

고린도의 "슈퍼 사도들"은 화려한 말솜씨와 추천서와 신비한 체험을 자랑했습니다. 바울은 질그릇, 매 맞은 등, 파선의 밤, 광주리, 그리고 떠나지 않은 가시를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약함 위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장막을 치고 머무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약한 사람들을 위한 편지가 아니라, 약한 그 자리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편지입니다.